“불법 유턴 차량에 받힌 직후부터 브레이크를 잡아도 차가 말을 안 듣고, 속도가 50㎞/h에서 188㎞/h까지 계속 빨라졌다. 자식들이 ‘화재도 많이 일어나고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기름값 부담 때문에 전기차를 샀는데, 이렇게 사고를 당하니 후회된다.”
그간 내연기관차, 전기차 공히 “차량이 급발진했다”는 주장이 적잖았지만 이번 사고에는 특이점이 있다. 운전자뿐 아니라 제3자인 승객도 일관되게 사고 차량이 이상 작동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척추 골절로 전치 12주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승객 변현식 씨(57)는 10월 10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지금 몸이 성치 않고 사고로 정신적 충격도 크지만 이번 사고를 반드시 공론화해야 한다”면서 25분간 기자에게 사고 당시 정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이건 급발진이 의심되는 사고가 아니라, 실제 급발진 사고”라고 여러 차례 강하게 주장했다. 교통사고 전문인 정경일 법무법인 엘앤엘 대표변호사도 이번 전기차 택시의 블랙박스 영상을 살펴본 후 “제3자인 승객이 택시운전자가 브레이크 밟는 것을 봤다고 증언하고 있고, 차량이 질주하는 과정이 블랙박스에 모두 찍혔다”면서 기존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와 달리, 구체적 정황이 확보된 점을 지적했다.
변 씨의 설명을 바탕으로 사고 당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9월 15일 새벽 0시 45분쯤 택시에 탄 그는 얼마 안 있어 기사가 “큰일 났다”며 당황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택시가 불법 유턴하던 차량과 충돌한 직후였다. 차 속도가 계속 높아지자 그는 조수석 뒷좌석에서 반쯤 일어나 택시기사에게 “시동 버튼을 누르라”고 외쳤다. 기사가 시동 버튼을 몇 차례 눌렀으나 차는 멈추지 않았다. 이때 “엉거주춤 일어나 순간적으로 기사의 다리를 봤는데, 개구리 뒷다리처럼 팔(八)자로 벌어졌고 발이 엑셀 쪽에 위치하지 않은 모습이 보였다”는 게 변 씨의 주장이다. 변 씨는 “차가 빠르게 질주하는 와중에도 나와 택시기사는 계속 대화하면서 1분에 걸쳐 상당히 침착하게 대응했다”며 “그사이 기사가 계속 브레이크를 밟았는데도 188㎞/h까지 속도가 높아졌으니, 이게 급발진이 아니면 뭐냐”면서 제작사인 현대자동차가 사고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경찰은 사고기록장치(EDR), 운행기록계(DTG) 등 부품을 포함한 사고 택시를 10월 5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보내 감정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국과수에선 EDR, DTG 분석은 물론, 브레이크 신호 이상 여부와 엔진 소리 음파 분석 등 종합적으로 감정할 예정이다. 제조사 입장은 어떨까. 현대자동차 관계자는 10월 11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9월 대구에서 일어난 아이오닉5 택시 급발진 의심 사고와 관련해 “향후 조사 과정에서 경찰, 국과수로부터 요청이 올 경우 원인 파악에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실제 자동차 급발진 의심 건수는 공개된 통계보다 많을 수 있다고 말한다. 1980년대 초반 국내에서도 자동차에 각종 전자제어장치(ECU)가 본격적으로 탑재되면서 이미 급발진으로 의심되는 사고 사례가 여럿 나왔다. 자동차급발진연구회장인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현재 전기차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한 전체적·객관적 통계가 없다시피 하다”며 “당국에 접수된 급발진 의심 사고가 전부가 아닐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자동차 급발진 문제와 관련해 관계 당국에 여러 차례 자문한 바 있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급발진이 의심된다”면서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적잖다고 한다. 연구 및 자문 과정에서 살펴본 사례 중 20%가량은 실제로 자동차 급발진이 의심된다는 게 김 교수의 분석이다. 자동차 관련 집단소송과 제조물책임 소송 사건을 다수 수임한 하종선 변호사는 최근 전기차의 잇단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해 “전기차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전력제어장치(EPCU)와 모터 제어장치의 소프트웨어가 오류를 일으켰을 개연성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대법원 판결이나 국과수 감정, 기업의 자체 검증을 통해 자동차가 급발진을 일으켰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사례는 전무하다. 그간 자동차 급발진 규명은 EDR 감식을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그 결과 이렇다 할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EDR이 사고 원인 규명의 만능키는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 중론이다. EDR의 본래 역할은 전체적인 사고기록이 아닌, 에어백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급발진이 실제로 발생했다면 일반 자동차의 두뇌 격인 ECU가 오작동을 일으킨 게 주요 원인일 텐데 EDR 기록이라고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김필수 교수는 “전자제어 이상은 흔적이 안 남고 사후에 재현도 불가능하다”면서 EDR 감식이 자동차 급발진 원인을 규명하는 데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2월 강원 강릉에서 자동차 급발진으로 의심되는 사고가 발생해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60대 여성이 몰던 티볼리 차량이 도로를 빠르게 질주한 끝에 지하통로에 추락해 운전자가 크게 다치고 동승한 12세 손자가 숨졌다. 사고 당시 차량 블랙박스에 운전자인 할머니가 손자에게 “브레이크가 안 된다”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녹음됐다. 숨진 아이의 유족은 “급발진으로 의심되는 사고가 발생하면 원인 규명 책임을 제조사에 부과해야 한다”면서 ‘제조물책임법’ 개정을 ‘국회 국민동의 청원’ 제도를 통해 호소했다. 이에 5만 명이 동의하면서 이른바 ‘도현이법’(제조물책임법 일부법률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됐고, 사고 후 여야 국회의원 3명이 각각 발의한 비슷한 취지의 제조물책임법 개정안과 함께 논의되고 있다.
강릉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에 관한 민사소송에서 원고인 운전자 측 법률대리인인 하종선 변호사는 “차량용 소프트웨어를 면밀히 분석해 오작동 여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면서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와 같이 높은 소프트웨어 분석 능력을 바탕으로 자동차 소프트웨어 오작동 여부를 검증하는 한편, 급발진 의심 사고가 일어날 경우 입증 책임을 제조사에 부과하는 ‘도현이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